장자크 루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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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 자크 루소는 1712년 제네바에서 태어난 철학자, 작곡가, 작가로, 계몽주의 시대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사회 계약론》, 《에밀》 등에서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강조하며, 사회와 문명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제시했다. 루소는 일반 의지,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사상을 통해 정치, 교육, 문학 등 다양한 분야에 영향을 미쳤으며, 낭만주의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그의 사상은 긍정적, 부정적 평가를 모두 받았으며, 현대에도 다양한 분야에서 논의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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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크 루소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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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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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일 | 1712년 6월 28일 |
출생지 | 제네바, 제네바 공화국 |
사망일 | 1778년 7월 2일 |
사망지 | 에르므농빌, 피카르디, 프랑스 왕국 |
배우자 | 테레즈 르바쇠르 (1745–1778) |
시대 | 계몽주의 (근대 철학) |
분야 | 서양 철학 |
학파/전통 | 프랑스 계몽주의 철학 사회 계약설 감성주의 낭만주의 선구자 |
주요 관심사 | 정치 철학, 음악, 교육, 문학 |
주요 사상 | 일반 의지 amour de soi amour-propre 인간의 도덕적 단순성 아동 중심 학습 시민 종교 인민 주권 적극적 자유 여론 |
영향을 준 인물 | 플라톤 소크라테스 플루타르코스 사무엘 폰 푸펜도르프 토머스 홉스 니콜라 말브랑슈 바뤼흐 스피노자 존 로크 몽테스키외 드니 디드로 볼테르 장 르 롱 달랑베르 데피네 부인 |
영향을 받은 인물 | 이마누엘 칸트 프랑스 혁명 미국 혁명 막시밀리앵 드 로베스피에르 루이 앙투안 드 생쥐스트 반계몽주의 낭만주의 데이비드 흄 토머스 페인 애덤 스미스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윌리엄 고드윈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자크 데리다 마르키 드 사드 레오 스트라우스 앨런 블룸 마리아 몬테소리 요한 볼프강 폰 괴테 헨리 데이비드 소로 레프 톨스토이 존 듀이 디미트리 키치키스 스타일 부인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스타니스와프 스타시츠 레오파르디 |
직업 | 철학자, 작가, 작곡가 |
국적 | 제네바 공화국 |
언어 | 프랑스어 |
장르 | 픽션 (감상 소설, 희극, 대본, 시) 논픽션 (논문, 에세이, 기사, 서간, 자서전) |
주제 | 사회 변화 |
활동 기간 | 1743년부터 |
사조 | 감성주의 |
주요 작품 | 사회 계약론 줄리, 또는 신엘로이즈 |
수상 | 디종 아카데미 (17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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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 관점 | |
관심 분야 | 정치 철학, 음악 이론, 언어 기원, 교육 철학, 문학 이론, 자서전, 식물학 |
주요 아이디어 | 일반 의지, 자기애, 자존심, 인간 본성, 아동 중심 교육, 시민 종교 등. 일반 의지의 개념을 제시하여 국민 주권 개념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자유주의 사상사에서는 적극적 자유를 주장한 사상가로 자리매김함. |
2. 생애
장자크 루소는 1712년 6월 28일 당시 독립 공화국이었던 제네바에서 시계공의 아들로 태어났다.[79] 어머니는 그가 태어난 지 9일 만에 세상을 떠났고,[81] 아버지와 숙모 밑에서 자랐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플루타르크의 『영웅전』 등을 읽으며 공화주의적 이상과 자유 정신을 키웠다.[82] 10세 때 아버지가 제네바를 떠난 후 외삼촌에게 맡겨졌고, 이후 보세(Bossey) 마을의 목사 밑에서 교육받았다.[83] 1725년경 금세공인의 도제가 되었으나 혹독한 대우를 견디지 못하고 1728년 제네바를 떠나 방랑길에 올랐다.[84]
사보이아에서 프랑수아즈-루이즈 드 바랑 부인을 만나 그녀의 후원으로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토리노 등지에서 잠시 머물렀다.[86] 이후 바랑 부인 곁에서 지내며 음악, 철학, 수학 등 다양한 학문을 독학했다. 이 시기 바랑 부인과의 관계는 그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 1742년에는 새로운 기보법을 발표하기 위해 파리로 갔으나 인정받지 못했다.
파리에서 디드로, 달랑베르 등 백과전서파 지식인들과 교류하며 『백과전서』 집필에 참여했다. 세탁부였던 테레즈 르바쇠르와 만나 평생 동반자로 지냈으나, 둘 사이의 자녀들을 모두 고아원에 맡긴 사실은 훗날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10] 1749년 디종 학술원 현상 공모에 제출한 『학문 및 예술론』이 당선되면서 큰 명성을 얻었다. 이 논문에서 그는 문명의 발전이 인간의 도덕성을 타락시킨다고 주장하며 계몽주의 사상가들과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다. 오페라 『마을의 점쟁이』(1752)의 성공으로 음악가로서도 인정받았다.
1755년에는 인간 불평등의 기원을 탐구한 『인간 불평등 기원론』을 발표하여 문명 비판을 심화시켰다. 1761년에는 서간체 소설 『누벨 엘로이즈』가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1762년에는 그의 정치철학을 집대성한 『사회계약론』과 교육 사상을 담은 『에밀』을 출간하며 사상가로서 절정기를 맞았다.
그러나 『사회계약론』과 『에밀』의 급진적인 내용은 기존의 정치 및 종교 질서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져 즉각적인 탄압을 받았다. 특히 『에밀』에 담긴 자연 종교 사상은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양측 모두로부터 비난받았고, 그의 책들은 금서로 지정되어 불태워졌으며(책 사르기), 루소에게는 체포 영장이 발부되었다.[190] 이로 인해 루소는 프랑스를 떠나 스위스, 프로이센 영토였던 뇌샤텔, 영국 등지를 떠도는 오랜 망명 생활을 시작했다. 망명 중에도 볼테르를 비롯한 비판자들의 공격과 데이비드 흄과의 불화 등으로 고통받았으며, 점차 피해망상에 시달렸다.[200][201][203]
1767년 프랑스로 돌아왔으나 여전히 불안정한 생활을 이어갔다. 말년에는 파리에서 악보 필사 등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자전적 저작인 《고백》과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집필에 몰두했다.[207][208][212] 1778년 후작 르네 루이 드 지라르댕의 초청으로 에르메농빌의 영지로 거처를 옮겼으나, 그해 7월 2일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213] 사후 프랑스 혁명 시기에 그의 사상이 재조명되면서 혁명의 사상적 아버지 중 한 명으로 추앙받았고, 1794년 유해는 파리의 팡테옹으로 이장되었다.
2. 1. 제네바에서의 유년기 (1712년 ~ 1728년)
장자크 루소는 1712년 6월 28일 당시 시 공화국이었던 제네바의 그랑뤼 40번지(Grand'rue 40)에서 시계공인 아버지 아이작 루소(Issac Rousseau)와 수잔 버나드(Suzanne Bernard) 사이에서 태어났다.[79] 어머니는 출산 후유증으로 9일 만인 7월 7일 사망했는데,[81] 루소는 훗날 이를 "나의 불행 중 첫 번째"라고 묘사했다.
루소 가문은 1549년 프로테스탄트 박해를 피해 제네바로 이주한 디디에 루소(Didier Rousseau)에 뿌리를 둔다.[6] 당시 제네바는 칼뱅주의의 중심지인 위그노 공화국이었으며, 아직 스위스 연방에 가입하지 않은 상태였다. 루소는 자신의 가족이 도시에서 투표권을 가진 중산층(moyen) 시민 계급에 속한다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했으며, 평생 자신의 책에 '장 자크 루소, 제네바 시민'이라고 서명했다.[80] 이론상 제네바는 시민들의 투표로 운영되었으나, 실제로는 소수의 부유한 가문들이 200인 의회와 소의회를 통해 과두제 형태로 도시를 지배했다. 이러한 정치적 배경 속에서 인민 주권에 대한 논의가 활발했으며, 루소의 할아버지는 민주주의 개혁가 피에르 파티오(Pierre Fatio)를 지지하다 처벌받기도 했다.
아버지 이삭 루소는 대대로 이어온 시계 제작자였으나 교육 수준이 높고 음악을 사랑했다. 루소는 어머니 사후 아버지와 아버지 쪽 숙모 수잔느의 보살핌 아래 자랐다. 1717년에는 상류층 지역인 그랑뤼를 떠나 장인들이 모여 사는 생제르베(Saint-Gervais) 지역으로 이사했다. 그는 7세 무렵부터 아버지와 함께 소설과 플루타르크의 『영웅전』 등을 밤새 읽으며 독서에 대한 사랑을 키웠다.[82] 루소는 특히 플루타르크의 영웅 이야기에 깊은 감명을 받았으며, 이는 훗날 그의 자유롭고 공화주의적인 정신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고 회고했다. 또한 지역 민병대의 활동을 목격하며 인민 정신의 구현으로 여기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7]
1722년, 루소가 10세 때 아버지 이삭은 귀족과의 다툼 및 불법 침입 혐의로 고발당하자 처벌을 피하기 위해 제네바를 떠나 베른 영토인 니옹(Nyon)으로 이주했다.[83] 아버지가 떠난 후 루소는 외삼촌 가브리엘에게 맡겨졌고, 곧 제네바 교외 보세(Bossey) 마을의 랑베르시에(Lambercier) 목사에게 보내져 사촌 아브라함 베르나르와 함께 2년간 기숙 생활을 했다. 이 시기 그는 목사의 여동생으로부터 부당한 처벌(매질)을 경험하며 불의한 지배에 대한 반항심을 키우게 되었다고 술회했다.
1724년 가을 제네바로 돌아온 루소는 법원 서기 마스롱(Maslon) 밑에서 잠시 서기 수습생으로 일했으나 오래가지 못했고, 한 달 반 후에는 폭력적이고 교육 능력이 없던 금세공인 뒤코망(Ducommun) 밑에서 5년 계약의 도제 수업을 시작했다. 그는 주인으로부터 일상적인 학대를 당하며 점차 거짓말, 태만, 절도 등 비행을 저지르는 소년이 되었다. 그러나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독서를 유일한 위안이자 도피처로 삼아 계속했다.[84]
15세가 되던 1728년 3월 14일, 저녁 늦게 제네바로 돌아오다 통행금지로 성문이 닫힌 것을 발견하고 충동적으로 도시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이후 인접한 사보이아에서 로마 가톨릭 사제의 도움으로 프랑수아즈 루이즈 드 바랑(Françoise-Louise de Warens) 부인을 만나게 된다.
2. 2. 프랑스에서의 활동 (1728년 ~ 1742년)

1728년 3월 14일, 제네바의 도시 성문 폐쇄 시간에 늦어 주인의 처벌을 두려워한 루소는 결국 도망을 결심하고 1년간의 방랑 생활을 시작했다.[85] 처음에는 이탈리아 토리노로 향했으나 정착하지 못하고 방랑하다가, 사보이의 콩피니옹에서 가톨릭 사제 퐁베르의 도움으로 아네시에 있는 바랑 부인(프랑수아즈-루이즈 드 바랑스)의 저택에 머물게 되었다.[86] 1728년 3월 21일, 15세의 루소는 29세의 바랑 부인을 처음 만났고, 그녀의 후원을 받게 되었다. 루소는 당시 만남을 "우아함으로 가득 찬 얼굴, 상냥한 아름다운 푸른 눈, 눈부실 정도의 안색, 그리고 황홀할 정도의 가슴 윤곽을 보았다"고 회상하며 깊은 인상을 받았음을 기록했다.[87][88] 이후 토리노에서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세례를 받았으며, 잠시 드 베르셀리 부인의 시종과 구봉 백작의 서기로 일했다.
바랑 부인의 후원으로 신학교에 입학했으나 사제가 될 의사가 없어 곧 그만두고 음악 공부에 잠시 몰두했다. 1730년에는 로잔으로 이주하여 가명으로 음악 교사 생활을 하기도 했고, 다음 해에는 처음으로 파리를 방문했다. 이후 리옹을 거쳐 샹베리 등지에서 생활했다.
1732년부터 1740년까지 루소는 샹베리와 샤르메트에서 바랑 부인 곁에 머물렀다. 이 시기 그는 음악에 몰두하는 한편, 바랑 부인의 서재를 이용해 철학, 수학 등 다방면에 걸쳐 독서하며 스스로 교양을 쌓았다. 루소가 20세가 되었을 때 바랑 부인은 그를 연인으로 받아들였는데, 이는 루소에게 혼란을 주기도 했지만 그는 평생 바랑 부인을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하나로 여겼다. 25세에는 어머니로부터 약간의 유산을 상속받아 그 일부를 바랑 부인에게 경제적 지원에 대한 보답으로 사용했다. 27세 무렵(약 1739-1740년)에는 잠시 리옹에서 가정교사로 일했다.
1741년 파리에서 계몽주의 사상가인 디드로, 달랑베르와 만나 교류하기 시작했다. 1742년, 루소는 자신이 개발한 숫자를 이용한 새로운 기보법을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에 발표하며 성공을 기대했다. 이 기보법은 활판 인쇄에 적합하도록 고안되었으며, 단선 악보 위에 음정과 리듬을 숫자기호와 점, 쉼표 등으로 표시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아카데미는 이 시스템이 비실용적이라고 판단하여 채택하지 않았지만, 그의 음악적 지식은 인정해주었다. 이 기보법에 대한 그의 논문인 ''Dissertation sur la musique modernefra''(근대 음악에 관한 논고)는 이듬해인 1743년에 출판되었다.
2. 3. 파리 시대 (1742년 ~ 1762년)
1742년 파리에 정착한 루소는 새로운 사상가들과 교류하며 활동 영역을 넓혀갔다. 이 시기 그는 평생의 동반자가 된 테레즈 르바쇠르( Marie-Thérèse Levasseur프랑스어 )를 만났다. 드니 디드로 등 백과전서파 지식인들과 교류하며 『백과전서』 편찬에 참여하기도 했으나, 점차 그들의 사상과 거리를 두게 된다.1749년 디종 학사원의 현상 논문 공모에 응모한 『학문 및 예술론』이 1등으로 당선되면서 루소는 큰 명성을 얻었다. 이 논문에서 그는 문명의 발전이 인간의 도덕성을 타락시킨다고 주장하여 기존 계몽주의 사상가들과 차별화되는 독자적인 사유를 선보였다. 또한 직접 작사, 작곡한 오페라 『마을의 점쟁이』(1752)가 성공을 거두며 음악가로서의 재능도 인정받았다.
1754년 고향 제네바로 돌아가 칼뱅주의로 개종하고 시민권을 회복하기도 했으나, 다시 파리 근교로 돌아와 저술 활동에 몰두했다. 1755년에는 인간 사회 불평등의 기원을 탐구한 『인간 불평등 기원론』을 발표하여 문명 비판을 더욱 심화시켰다. 이 시기 소피 드 우드토와의 관계는 훗날 큰 성공을 거둔 서간체 소설 『누벨 엘로이즈』(1761) 집필에 영감을 주었다.
그러나 점차 백과전서파와의 관계는 악화되어 결국 결별에 이르렀고, 후원자였던 드 에피네 부인과도 갈등을 겪었다. 반면, 뤽상부르 공작이나 콩티 공작과 같은 유력 귀족들의 후원을 받기도 했다.
1761년 『누벨 엘로이즈』의 성공에 이어, 1762년에는 그의 정치철학을 집대성한 『사회계약론』과 교육 사상을 담은 『에밀』을 연이어 출판하며 사상가로서 절정기를 맞았다. 하지만 이 두 저작은 기존의 정치 및 종교 질서에 도전하는 급진적인 내용으로 인해 즉각적인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에밀』의 "사보이 목사의 신앙 고백" 부분은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양측 모두로부터 비난받았다. 결국 프랑스와 제네바 당국은 그의 책들을 금서로 지정하고 공개적으로 불태웠으며(책 사르기), 루소에게 체포 영장을 발부했다. 이로써 루소의 파리 시대는 막을 내리고 기나긴 망명 생활이 시작되었다.
2. 3. 1. 학문적, 예술적 활동

드 바랑 부인과 그녀 주변의 교육받은 가톨릭 성직자들은 루소를 문학과 사상의 세계로 이끌었다. 그는 심기증을 앓기도 했지만, 20대에 철학, 수학, 음악을 깊이 공부했다.
1742년, 루소는 자신이 개발한 새로운 번호가 매겨진 악보 시스템을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에 발표하기 위해 파리로 갔다. 이 시스템은 활판 인쇄에 적합하게 고안되었으나, 아카데미는 실용성이 부족하다고 판단하여 채택하지 않았다. 다만 그의 노력을 칭찬하며 개선을 격려했다. 이 시기에 루소는 드니 디드로와 친구가 되어 문학적 활동에 대해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
1743년부터 1744년까지 베네치아 주재 프랑스 대사의 비서로 근무하며 이탈리아 음악, 특히 오페라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갖게 되었다. 그는 이 경험으로부터 정부 관료제에 대한 깊은 불신을 갖게 되었다.
파리로 돌아온 후, 루소는 재봉사 테레즈 르바쇠르와 관계를 맺었다. 그의 『고백록』에 따르면, 그는 테레즈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을 모두 고아원에 맡겼다고 한다. 이 사실은 훗날 그가 교육 이론가로 명성을 얻었을 때 볼테르나 에드먼드 버크와 같은 비판자들에게 인신공격의 빌미를 제공했다.[10]
1749년 음악 관련 글을 시작으로 루소는 디드로와 달랑베르가 주도한 『백과전서』 편찬에 참여하여 여러 항목을 기고했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1755년에 쓴 정치 경제에 관한 글이었다. 루소의 사상은 동시대 사상가들, 특히 디드로와의 교류를 통해 발전하는 경우가 많았다. 1749년, 루소는 디종 학사원(Académie de Dijon)에서 '예술과 학문의 발전이 도덕의 순화에 기여했는가'라는 주제로 논문을 공모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는 예술과 과학이 오히려 인간의 도덕적 타락을 초래했다고 주장한 『예술과 과학에 대한 담론(Discourse on the Arts and Sciences)』(1750)으로 1등상을 수상하며 학계에 큰 명성을 얻었다. 자연선택 개념을 "인류를 개선하는 수단"으로 보았다는 주장도 있다.[11]
루소는 음악 활동도 꾸준히 이어갔다. 1752년에는 직접 작사, 작곡한 오페라 『마을의 점쟁이(Le devin du village)』가 루이 15세 앞에서 공연되어 호평을 받았다. 국왕이 그에게 연금을 제안했으나, 루소는 이를 거절하여 '왕의 연금을 거절한 사람'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같은 해, 이탈리아 음악가들의 파리 방문과 페르골레지의 『하녀 주인(La serva padrona)』 공연으로 촉발된 부퐁 논쟁(Querelle des Bouffons)에서는 라모 등 프랑스 음악의 지지자들에 맞서 이탈리아 음악의 우수성을 열정적으로 옹호하며 『프랑스 음악에 관한 서한(Letter on French Music)』을 발표하여 논쟁에 큰 영향을 미쳤다.
1754년 제네바로 돌아와 칼뱅주의로 다시 개종하고 시민권을 회복했다. 1755년에는 두 번째 주요 저작인 『인간 불평등 기원론』을 완성하여 『예술과 과학에 대한 담론』에서 제기했던 문명 비판 논지를 더욱 발전시켰다.
이후 소피 드 우드토와의 이루어지지 못한 관계는 그의 서간체 소설 『누벨 엘로이즈』(1761) 집필에 부분적으로 영감을 주었다. 이 소설은 출간 즉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으며, 스위스 시골의 자연미에 대한 묘사는 19세기 알프스 풍경에 대한 낭만주의적 열풍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이 시기 루소는 후원자였던 드 에피네 부인 및 『백과전서』 편찬자들(디드로, 그림 남작 등)과 관계가 악화되어 결별했다. 이 무렵 그는 프랑스의 유력 귀족인 뤽상부르 공작과 콩티 공작의 후원을 받기도 했으나, 그들의 어용세 관행을 비판하며 관계가 소원해졌다.
『백과전서』 편집자들과의 결별 후, 루소는 라 메트리나 돌바크 남작 등의 유물론적 사상과 거리를 두며 인간 영혼과 우주의 영적 기원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강조하는 주요 저작들을 집필했다. 1762년 4월에는 정치 철학의 고전이 된 『사회계약론』을 출판했다. 이 책에서 제시된 '시민 종교' 개념은 기존 기독교가 공적 참여보다는 복종을 가르친다고 비판하여 논란을 일으켰다. 그의 친구 앙투안-자크 루스탕조차 이 부분에 대해 정중한 반박 글을 썼고, 루소는 그 글의 출판을 도왔다.
같은 해 5월에는 교육 철학서 『에밀, 혹은 교육론』을 출간했다. 이 책의 일부인 "사보이아 보좌신부의 신앙고백(Profession de foi du Vicaire savoyard)"은 자연 종교 사상을 담고 있었는데, 원죄나 신의 계시와 같은 전통적인 기독교 교리를 부정하고 모든 종교가 동등하게 가치 있다는 종교적 무관심을 주장하여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양측으로부터 격렬한 비난을 받았다. 결국 『사회계약론』과 『에밀』은 프랑스와 제네바에서 금서로 지정되고 공개적으로 불태워졌으며, 루소에게는 체포 영장이 발부되었다. 제네바의 자코브 베르네와 같은 옛 친구들도 그의 견해를 비판했다. 데이비드 흄은 루소가 확립된 견해에 대해 공개적으로 경멸을 표했기 때문에 이러한 반응이 놀랍지 않다고 평했다.
프랑스와 스위스 당국의 박해를 피해 루소는 프로이센 왕국의 프리드리히 2세가 통치하는 뇌샤텔로 피신했다. 그는 뇌샤텔 인근의 모티에에 거주하며 프리드리히 2세의 보호를 받았다. 루소는 도움에 감사하면서도 프리드리히 2세에게 군사 활동을 중단하고 백성의 행복에 힘쓸 것을 촉구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루소는 작곡가로서도 상당한 업적을 남겼다. 7편의 오페라를 포함한 다양한 장르의 음악 작품을 작곡했으며, 음악 이론에도 기여했다. 그의 음악은 후기 바로크 양식과 새롭게 부상하던 고전주의 양식(갈랑 양식)이 혼합된 과도기적 특징을 보여준다. 그는 글룩이나 C. P. E. 바흐와 같은 세대의 작곡가로 분류될 수 있다. 그의 가장 잘 알려진 음악 작품 중 하나는 단막 오페라 『마을의 점쟁이』이다. 이 작품에 포함된 이중창 "Non, Colette n'est point trompeuse"는 후에 베토벤에 의해 독립된 노래로 편곡되었으며,[43] 제8장면의 가보트는 민요 "고 텔 앤트 로디" 멜로디의 원전이 되었다.[44] 그는 또한 여러 편의 모테트를 작곡했는데, 그중 일부는 파리의 콩세르 스피리튀엘에서 연주되기도 했다.[45] 루소는 바랑스 부인의 집에서 정식으로 음악 교육을 받았으며,[46] 그의 음악에 대한 열정은 음악 애호가였던 숙모 수잔느의 영향도 컸다. 1742년에는 번호가 매겨진 악보 체계를 고안하여 과학 아카데미에 제출했으며,[47] 악보를 읽는 연주자가 시선을 크게 움직일 필요가 없도록 행마다 읽는 방향을 교대로 바꾸는 "부스트로페돈" 표기법을 제안하기도 했다.[48]
라모와의 음악 논쟁에서 루소는 화성보다 선율의 우위를 주장하며 이탈리아 음악을 옹호했다.[47] 이는 전통적인 규칙보다는 예술가의 자유로운 창의적 표현을 중시하는 생각으로, 후대 낭만주의 사상의 특징과 연결되기도 한다.[49] 루소의 음악적 사상과 작품은 글룩, 모차르트 등 후대 작곡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는 『마을의 점쟁이』 작곡 이후, 세속적인 가치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도덕적 신념 때문에 더 이상 극장 음악 작곡은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주요 음악 작품'''
작품명 | 장르 | 작곡/초연 연도 |
---|---|---|
Les Muses galantes | 오페라 | 1743 (작곡), 1745 (초연) |
Les Fetes de Remire | 오페라 발레 | 1745 |
Symphonie à Cors de Chasse | 교향곡 | 1751 |
마을의 점쟁이 | 1막 오페라 | 1752 |
Salve Regina | 환호(Antiphon) | 1752 |
Chansons de Bataille | 노래 | 1753 |
피그말리온 | 멜로드라마 | 1762 (작곡), 1770 (초연) |
Avril | 아리아 (레미 벨로 시) | |
Les Consolations des Misères de Ma Vie | 음악 모음집 | 1781 (사후 출판) |
Daphnis et Chloé | 오페라 (미완성) | |
Que le jour me dure! | 아리아 | |
Le Printemps de Vivaldi | 비발디 작품 편곡 | 1775 |
2. 3. 2. 저술로 인한 탄압과 망명
1761년 서간체 소설 《누벨 엘로이즈》가 출판되어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작품은 스위스 시골의 아름다운 자연 묘사로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19세기 알프스 풍경에 대한 열풍을 일으키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소설은 루소가 25세의 소피 드 우드토와 맺었던 미완의 낭만적인 관계와 젊은 시절 드 바랑 부인과의 관계에 대한 기억에서 영감을 받았다. 소피는 루소의 후원자였던 드 에피네 부인의 사촌이었는데, 루소는 드 에피네 부인 및 그녀 주변의 백과전서파 지식인들과 관계가 악화되었다. 그는 드 에피네 부인의 부름에 응하는 것을 싫어했고, 백과전서파들의 위선적인 대화와 무신론을 혐오했다. 이러한 갈등은 루소와 드 에피네 부인, 그녀의 애인인 그림, 그리고 루소의 옛 친구였던 디드로 사이에 격렬한 다툼으로 이어졌고, 결국 루소는 백과전서파와 결별하게 된다. 디드로는 나중에 루소를 "거짓되고, 사탄처럼 허영심 많고, 배은망덕하고, 잔인하고, 위선적이며, 악하다"고 비난했다.

백과전서파와의 결별 시기에 루소는 그의 사상의 핵심을 이루는 주요 저작들을 집필했다. 이 작품들에서 그는 디드로, 라 메트리, 도르바흐 등의 유물론과는 대조적으로 인간 영혼과 우주의 영적인 기원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강조했다. 이 시기 루소는 프랑스의 유력 귀족인 몽모렌시-룩셈부르크 공작과 콩티 공작의 후원을 받았다. 이들은 루소를 개인적으로 좋아하고 그의 지적 능력에 감탄했지만, 한편으로는 그를 이용하여 루이 15세와 퐁파두르 부인 중심의 정치 세력에 대항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그러나 루소는 이들과의 관계에서도 어용세 관행을 비판하는 등 타협하지 않는 태도를 보여 스스로 어려움을 자초하기도 했다.
1762년에는 《에밀》과 《사회계약론》이라는 중요한 저작들을 연이어 발표했다. 《사회계약론》은 자유와 평등을 강조하며 특권 정치 체제를 비판했고, 《에밀》은 교육론을 다루면서 제4권 "사보이 목사의 신앙 고백"에서 자연신론에 입각한 종교관을 제시했다. 특히 "사보이 목사의 신앙 고백"은 원죄와 신의 계시를 부정하고, 모든 종교는 동등한 가치를 지닌다는 종교적 무관심을 주장하여 로마 가톨릭 교회와 프로테스탄트 양측 모두로부터 격렬한 반발을 샀다. 루소의 친구 앙투안-자크 루스탕조차 《사회계약론》의 시민 종교 장에 대해 반박 글을 썼을 정도였다.
예수회는 《에밀》의 출판을 방해했고, 결국 이 책은 네덜란드에서 먼저 출간된 후 4개월이 지나서야 프랑스에서 판매될 수 있었다.[260] 하지만 곧 프랑스와 제네바에서 루소의 책들은 금서로 지정되었고, 파리 대주교는 설교단에서 루소를 비난했으며, 그의 책들은 공개적으로 불태워졌다(책 사르기). 1762년 6월 9일, 파리 고등법원은 루소에 대한 체포 영장을 발부했다. 제네바의 옛 친구 자코브 베르네마저 그의 견해를 비판하는 글을 썼다. 데이비드 흄은 이러한 상황에 대해 루소가 "자신의 감정에 어떤 베일도 씌우지 않았고, 확립된 의견에 대한 자신의 경멸을 감추는 것을 경멸했기 때문에" 박해받는 것이 놀랍지 않다고 평했다.
체포 영장이 발부되기 전날 밤, 후원자 뤼크상부르 원수의 도움으로 루소는 프랑스를 떠나 스위스로 피신했다.[190] 그러나 제네바에서도 환영받지 못하고 박해가 시작되자, 프로이센 영토였던 뇌샤텔 지방의 모티에 마을로 이주했다. 당시 프로이센은 계몽 전제군주 프리드리히 대왕의 통치 아래 있었고, 루소는 프리드리히 대왕에게 보호를 요청하는 편지를 보내 은신처를 마련할 수 있었다.[191] 모티에에 머무는 동안(1762년~1765년) 루소는 독서와 집필에 몰두하며 제임스 보스웰과 같은 방문객들을 만나기도 했다.[12]
하지만 모티에서도 평온은 오래가지 못했다. 지역 목사인 프레드릭-기욤 드 몽몰랭은 루소의 사상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공개적으로 적그리스도라고 비난했다. 목사의 선동에 자극받은 교구민들은 루소가 산책을 나갈 때 돌을 던졌고, 1765년 9월에는 루소가 머물던 집에 돌이 날아와 유리창이 깨지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한편, 1764년에는 볼테르가 익명으로 《시민들의 감정》이라는 글을 발표하여 루소의 사생활(특히 자녀를 고아원에 보낸 일)을 폭로하며 공격했고, 이는 루소가 자신의 삶을 변호하기 위해 《고백》을 집필하게 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194] 또한 제네바 당국의 처사에 실망한 루소는 1764년 『산에서의 편지』를 써서 제네바를 비판하고 자신을 변호했다.
결국 루소는 모티에를 떠나 비엘 호의 작은 섬인 생피에르 섬으로 피신했다(1765년 9월). 그는 섬의 자연 속에서 식물 채집을 즐기며 잠시 평온을 찾았으나,[195] 이 섬이 속한 베른 주의 상원은 1765년 10월 루소에게 15일 이내에 섬을 떠나라고 명령했고, 루소의 연장 요청과 감금 제안마저 거부하며 24시간 내 추방을 통보했다. 1765년 10월 29일, 루소는 생피에르 섬을 떠나 스트라스부르로 향했다.
스트라스부르에서 잠시 환대를 받았던 루소는 철학자 데이비드 흄의 초청을 받아들여 영국으로 가기로 결심한다.[197] 1765년 12월 파리를 거쳐 1766년 1월 흄과 함께 런던에 도착했다. 런던에서 루소는 열렬한 환영을 받았고, 조지 3세 국왕을 만나기도 했다. 흄은 루소를 위해 거처를 마련하고 영국 정부로부터 연금을 받을 수 있도록 주선하는 등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그러나 루소는 점차 흄의 행동에서 진정성을 의심하게 되었고, 특히 흄의 친구인 호레이스 월폴이 루소를 조롱하기 위해 쓴 프리드리히 대왕 명의의 위조 편지가 신문에 실렸을 때 흄이 이를 가볍게 넘기자 불쾌감을 느꼈다.[200][201] 루소의 피해망상은 심해졌고, 결국 1766년 6월 흄에게 절교를 선언했다. 영국에서의 불안정한 생활과 흄과의 불화는 루소가 《고백》( Les Confessions프랑스어 ) 집필에 더욱 몰두하게 만들었다.[202] 루소의 정신 상태는 극도로 불안정해져, 오늘날의 조현병에 해당하는 증상을 보였을 것으로 추정된다.[203]
결국 루소는 1767년 5월 영국을 떠나 프랑스로 돌아왔다.[203] 여전히 파리 고등법원의 체포 영장이 유효했기 때문에, 콩티 공작과 오노레 미라보 등의 도움을 받아 트리 성에 1년간(1767-1768) 은신했다. 이 시기 루소는 극심한 망상에 시달리며 주변 사람들을 의심하고 두려워했다.[204] 1768년에는 리옹, 그르노블 등을 여행하며 지인들을 만나고 샹베리에서 발랑스 부인의 묘소를 참배하기도 했다. 이 해에 오랜 동반자였던 테레즈 르바쇠르와 정식으로 결혼했다.[205]
1770년, 루소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파리로 돌아왔다. 여전히 수배 상태였지만, 대중적인 인기에 힘입어 경찰 당국은 그를 체포하지 않았다. 루소는 파리에서 악보 필사, 식물 채집 등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비교적 자유롭게 생활했다.[207] 이 시기에 《고백》( Les Confessions프랑스어, 1782-89)을 완성하고, 출판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낭독회를 통해 내용을 공개했다.[208] 또한 《폴란드 통치론》(Considérations sur le gouvernement de Pologne, 1771)을 집필하여 정치 제도에 대한 관심을 이어갔다.[210]
그러나 정신적 고통은 계속되어 박해 망상에 시달렸다. 1772년부터는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루소, 장-자크를 재판하다 - 대화》(Rousseau juge de Jean-Jacques, 1777)를 집필하기 시작했고, 이를 노트르담 대성당에 봉헌하려 했으나 실패하자 신마저 자신을 외면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211] 1776년부터는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는 자전적 성격의 글인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Les Rêveries du promeneur solitaire프랑스어, 1776-78) 집필을 시작했다.[212] 이 작품들은 《누벨 엘로이즈》와 함께 낭만주의 문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노년에 접어들면서 건강이 악화되고 빈곤에 시달렸으며, 병든 테레즈를 간호해야 하는 상황 때문에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은 미완성으로 남게 되었다. 1778년, 루소의 열렬한 팬이었던 지랄당 후작의 초청으로 파리 근교의 에르메농빌로 이주하여 잠시 평온한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1778년 7월 2일, 루소는 갑자기 쓰러져 세상을 떠났다. 향년 66세였으며, 사인은 요독증으로 추정된다. 그의 유해는 에르메농빌의 포플러 섬에 매장되었다.[213]
사후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자 루소는 혁명의 사상적 선구자 중 한 명으로 재평가되었고, 그의 유해는 1794년 파리의 팡테옹으로 이장되어 프랑스의 위인들과 함께 안치되었다.
3. 주요 사상
루소 사상의 출발점 중 하나는 1754년 디종 학술원의 "무엇이 인간 불평등의 근원인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한 고민이었다. 그는 이 질문에 답하며 소유권 제도와 사회 조직의 발전이 어떻게 불평등과 비참함을 낳았는지 탐구하고, 이를 자연 상태의 자유롭고 평등한 상태와 대조하여 설명했다. 이는 이후 그의 대표작 《인간 불평등 기원론》과 《사회 계약론》의 중요한 기초가 되었다.
루소는 몽테뉴, 플라톤, 플루타르코스 등 고전 사상가들의 영향을 받았으며, 특히 예술과 과학의 발전이 오히려 인류의 도덕적 타락을 가져왔다는 문제의식을 발전시켰다. 그는 또한 토마스 홉스, 존 로크, 사무엘 폰 푸펜도르프 등 근대 계약론 사상가들의 이론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며 자신의 정치 철학을 구축했다.[19] 홉스 등이 자연 상태를 상호 경쟁과 불확실성의 상태로 본 것과 달리, 루소는 초기 자연 상태에는 갈등이나 사유 재산이 없었을 것이며, 인간은 본성적으로 악하지 않고 오히려 "타락하지 않은 도덕"을 지녔다고 보았다.
1762년에 발표된 《사회 계약론》은 자유와 평등이라는 자연권을 국가 상태에서도 보장하기 위한 이론적 토대를 마련하고, 인민주권 사상을 완성한 저작으로 평가받는다. 루소는 이 책에서 모든 개인이 자신의 권리를 공동체 전체에 양도하고, 공동체의 일반 의지에 복종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일반 의지는 단순한 다수결이 아니라 항상 공공의 이익을 지향하는 이상적인 의지이며, 이를 통해 정당한 권력 행사가 가능하다고 보았다. 루소는 주권이 국민에게 있으며, 정부는 단지 주권자인 국민의 의지를 집행하는 대리인에 불과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대의 민주주의보다는 시민들이 직접 참여하는 직접 민주주의를 이상적인 형태로 생각했다.
루소는 군주정, 귀족정, 민주정 등 기존의 정부 형태들이 사회 내 불평등의 정도에 따라 등장했지만, 결국에는 더 심각한 불평등을 낳고 혁명에 의해 전복되는 과정을 반복한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그는 인간의 자기 개선 능력을 믿었으며, 정치적 선택을 통해 더 나은 사회 시스템을 만들 수 있다고 보았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루소는 근대적인 부의 축적과 사치를 비판하고, 농업 중심의 자급자족적인 사회를 긍정적으로 보았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루소가 잘 규제된 상업의 필요성 또한 인정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27] 루소는 공화국의 건강을 위해 공리주의나 과도한 자기애, 통제되지 않는 상업 활동 등을 경계하면서도, 이를 사회 전체의 이익에 부합하도록 길들이는 방안을 모색했다고 평가받는다.[28]
3. 1. 일반 의지
루소에게 의지란 감정이나 이성과는 별개로 인간 본성에 내재된 능력으로, 무언가를 추구하거나 회피하고, 긍정하거나 부정하려는 마음을 의미한다. 사회계약론에서 제시된 일반 의지(volonté généralefra)는 "모든 공동의 힘으로 각 연합자와 그의 이익(les biens)을 방어하고 보호하며, 이를 통해 각자는 전체에 결합하면서도 오직 자신에게만 복종하여 이전처럼 자유롭게 남게 되는 연합 형태"를 추구하는 의지를 말한다. 이러한 일반 의지를 가진 개인들이 모여 사회 계약 행위를 통해 국가를 창설한다면, 국가 자체와 모든 권력은 일반 의지에서 비롯된다. 그 국가는 "개인과 각 연합자의 이익", 즉 공공선을 추구하는 동시에, "전체에 결합"되는 것 외에는 어느 개인에게도 종속되지 않는, 구성원 모두의 "동등한 자유", 즉 평등을 지향하게 된다.그러나 사회계약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의 의지가 일반 의지와 동일한 것은 아니다. 이전 체제를 고수하거나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사적인 '개별 의지'를 가진 사람도 존재하기 때문에, 모든 인민의 의지를 단순히 합산한 '전체 의지'는 일반 의지와 구별된다. 따라서 국가가 성립된 후에는 의회에서 논의되는 다양한 의견(법안이나 정책 등) 중에서 무엇이 진정으로 "공공선"과 "동등한 자유"에 부합하는지를 결정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가 된다. 루소는 의회 심의(투표) 결과 나타난 다수 의견에서, 공공선과 자유에 대해 넘치거나 모자라는 부분을 제외하고 남은 공통된 부분에서 일반 의지를 발견할 수 있다고 보았다. 다만, 이를 위해서는 의원들이 파벌을 형성하여 자신들의 개별 의지를 다수 의견으로 위장시키지 않고, 각자 자신의 내면의 빛(양심)에 따라 심의하고 투표해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필요하다.
루소의 "일반 의지" 개념은 완전히 독창적인 것은 아니며, 당시 법률 및 신학 저술에서 이미 사용되던 용어였다. 디드로, 몽테스키외, 그리고 그의 스승인 오라토리오회의 말브랑슈 등도 이 용어를 사용했다. 이는 특정 시점의 사적이고 특수한 이해관계를 넘어서는, 법적 전통에 구현된 공동의 이익을 지칭하는 데 쓰였다. 루소는 이 개념을 발전시켜, 주어진 국가의 시민들이 자신의 주권 의회에서 필요하다고 판단하는 행동을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다소 민주적인 이념을 제시했다. 그는 토론과 투표를 통해 모든 시민이 입법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믿었으며, 이 과정을 통해 형성되는, 개별 구성원의 욕구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지만 전체 사회의 집합적인 의지를 "일반 의지"라고 명명했다.[50]
이 개념은 스피노자와 같은 17세기 급진 공화주의 전통과도 연결된다. 루소는 스피노자와 여러 중요한 지점에서 의견을 달리했지만, 평등의 중요성을 강조한 점에서는 유사했다. 스피노자의 mens unalat(하나의 마음)처럼 루소의 '일반 의지' 역시 공동선과 정치적 안정을 보장하는 핵심 요소이며, 평등이라는 최고 기준 없이는 의미를 잃는다고 보았다. 프랑스 혁명 시기 자코뱅 클럽들이 토지 재분배와 같은 평등 증진 개혁을 요구하며 루소를 자주 인용한 것은 이러한 급진적 전통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루소는 토마스 홉스, 존 로크와 더불어 근대 사회계약설의 주요 사상가 중 한 명이다. 그는 1755년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 자연 상태와 이성에 의한 사회화 과정을 논했다. 홉스가 묘사한 투쟁 상태의 자연 상태는 이미 도덕적 관계가 존재하는 사회 상태이지 진정한 자연 상태가 아니라고 비판했다.[214] 루소는 가설적으로[215], 도덕적 관계(사회성)나 이성이 없고 타인을 인식하지 못한 채 고립되어 존재하는 야생 상태(고독과 자유)를 자연 상태로 설정했다.[216] 이 상태에서는 가족과 같은 사회적 단위도 존재하지 않는다. 루소는 자연 상태의 인간을 "숲 속을 헤매며, 재주도, 언어도, 주거도, 전쟁도, 동맹도 없고, 동포를 필요로 하지도 해치려 하지도 않으며, 아마 서로를 개인적으로 기억하지도 못했을 것"이라고 묘사했다. 그는 "미개인은 아주 적은 정념에만 지배되고 혼자서도 충분했기에, 이 상태 고유의 감정과 지식만을 가졌고, 자신의 진정한 욕망만을 느끼고 이익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만 바라보았으며, 지성은 허영심과 마찬가지로 발전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기술은 발명가와 함께 사라지고 교육이나 진보 없이 세대가 거듭되며, 각 세대는 같은 지점에서 출발하여 오랜 세월 야만 상태에 머물렀다고 보았다. "종은 이미 늙었는데, 인간은 언제까지나 어린아이로 남아 있었다."
이성에 의해 사람들이 도덕적 관계를 맺고 문명화된 집단에 소속되면서, 오히려 억압으로 인한 불자유와 불평등이 만연하는 사회 상태가 도래했다고(“타락”) 규정했다.[217] 루소는 자연 상태의 자유와 평화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사회 상태를 타락한 것으로 보았지만, 인간이 문명을 버리고 다시 자연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고 인정하며 사유를 전개했다.[218]
1762년 『사회계약론』에서는 사회계약과 일반 의지를 통해 이상적인 정치 사회를 구상했다.[219] 루소의 사회계약설은 기존 정치 사회의 기원을 설명하려던 홉스나 로크와 달리, 미래의 이상적인 사회 건설을 위한 원리로서 제시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사회계약론』에서 루소는 "일반 의지"를 여론과 같은 단순한 "특수 의지(개인의 의지)"의 총합(전체 의지)이 아니라, 각 "특수 의지"에서 서로 상충하는 부분을 제외하고 남은 "차이의 총합", 즉 공통의 사회적 이익으로 보았다. 이 사회적 이익은 곧 공공선 또는 공공의 복지가 된다고 설명했다.[220] 루소는 대의제 민주주의와 그에 따른 다수결 원칙을 비판했는데[221], 이는 정치 사회(국가)가 모든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보장해야 한다는 신념 때문이었다.[222] 따라서 그는 당파 정치나 일부 정치인의 이익 추구를 배제하고, 정치가 일반 의지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진정으로 민주적인 "공화국"의 수립을 요구했다. 단, 루소가 말하는 "공화국"은 일반적인 의미의 공화정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군주정이라도 법치주의가 철저히 지켜진다면 "공화국"으로 간주될 수 있다고 보았다.[223] 루소의 논의는 궁극적으로 정치가 일반 의지에 복종하는 인민주권(국민주권) 체제를 지향했다.[224] 그러나 루소는 일반 의지에 기반한 정치 체제로서 민주정 외에 군주정이나 귀족정을 배제하지 않았으며, 적합한 정치 체제는 시대나 국가의 규모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보았다.[225] 즉, 사회계약에 의해 성립된 국가가 군주정이든, 귀족정이든, 민주정이든 민의의 지지를 받는다면 가능하며, 중요한 것은 정체(政體) 자체가 아니라 통치자가 국민의 일반 의지에 복종하는지 여부라고 생각했다.[226]
3. 2. 평등
루소 사상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개념 중 하나는 '''일반의지'''이다. 이 개념은 다양한 해석의 여지가 있지만, 루소 철학의 근간에는 평등 사상이 깊이 자리 잡고 있다. 루소는 사상 최초로 인간 평등 문제를 실천적으로 파고든 철저한 '''평등주의'''자로 평가받는다. 동시대 계몽주의 철학자들도 평등을 주장했지만, 이는 주로 이론적인 차원에 머물렀고 실제로는 엘리트주의적 경향을 보였다. 저명한 철학자 칸트조차 초기에는 엘리트주의적 입장을 가졌으나,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을 읽고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고백했다. 칸트는 "나는 천성적으로 진리를 추구하는 자로 지식만이 인류의 영광을 이룬다고 믿어왔다. 아무것도 모르는 평범한 대중을 경멸했다. 루소를 읽고는 이런 맹목적 편견이 사라졌다. 나는 인간성에 대한 존경심으로 도덕적 평등주의자가 됐다"라고 술회하며 루소의 영향을 인정했다.루소에게 평등은 그의 삶과 철학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주제였다. 그는 모든 사회악과 갈등의 근본 원인이 '경제적 불평등'에 있다고 보았다. 문명이 발전함에도 불구하고 빈부 격차가 심화되고 사회 문제가 만연하는 현실을 목격한 그는, 이를 해결하기 위한 사상으로 일반의지 개념을 발전시켰다. 이는 분열된 사회를 통합하기 위해 강력한 지도력을 주장했던 마키아벨리처럼, 수천 년간 고착화된 불평등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기 위한 사회 변혁의 필요성을 역설한 것이었다. 일반의지는 단순히 다수의 의견이나 보편적인 생각을 넘어, 진리와 선을 전제하는 공동체의 의지를 의미한다. 루소는 일반의지가 모든 사람의 생각이 아닐 수도 있으며, 때로는 한 사람의 견해라도 그것이 진리와 선에 부합한다면 일반의지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루소의 철저한 평등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일반의지는 추상적이거나 초월적인 진리가 아니라 현실 속에서 구현되어야 할 정의이자 공공선이다. 그리고 그 정의와 선의 핵심은 바로 '''평등'''이며, 특히 경제적 평등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경제적 평등을 통해 공동체 구성원 모두의 이익을 보장하고, 서로 공존하며 번영하는 공화주의 사회를 이루는 것이 루소가 추구한 목표였다. 따라서 루소의 일반의지는 단순한 관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실천을 통해 구현되어야 하며, 평등 실현이라는 명확한 방향성을 가진 공동체의 합일된 의지를 의미한다.[261]
루소는 그의 여러 저서, 특히 『불평등 기원론』, 『정치경제론』, 『사회 계약론』 등에서 경제에 관한 생각을 비중 있게 다루었다. 일부 후대 경제학자들은 루소의 경제 이론이 체계적이지 않다고 비판하기도 했지만,[26] 많은 경제 사상사 학자들은 그의 금융관이나 발전 사상에서 깊이를 발견하며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루소는 근대적인 부의 축적과 사치를 비판했으며, 농업 중심의 자급자족 경제를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러나 동시에 잘 관리되는 시민 사회 안에서는 규제된 상업 활동의 필요성 또한 인정했다는 해석도 제기된다.[27] 즉, 루소는 공화국의 건강한 운영을 위해 공리주의, 과도한 자기애, 통제되지 않는 무역, 금융, 사치 등을 완전히 배격하기보다는 사회 전체의 이익에 부합하도록 길들이려 했다고 볼 수 있다.[28]
3. 3. 자연으로 돌아가라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세상에 널리 알려진 루소의 명언이지만[262], 그 의미는 단순히 문명 이전의 원시 상태로 돌아가자는 뜻이 아니다. 루소는 《사회계약론》에서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지만 사회 속에서 쇠사슬에 묶여 있다"고 말하며, 문명 자체를 거부한 것이 아니라 자유롭고 평등하지 못한 당시 문명사회의 부조리와 모순을 비판하고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고자 했다. 서구어에서 '자연'(natura)은 '본성'이라는 의미도 가지므로, 루소는 이 말을 통해 인간의 천부적 자연권인 자유와 평등의 회복을 강조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즉, 자연의 낭만성이나 야성보다는 평화롭고 자유로우며 평등했던 사회의 원형을 복원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루소는 그의 정치 철학을 계약론과 토마스 홉스, 사무엘 폰 푸펜도르프, 존 로크 등의 사상에 대한 비판적 독서를 통해 발전시켰다.[19] 이들은 모두 중앙 권위 없는 상태에서 인간은 상호 경쟁과 불확실성에 놓인다고 보았지만, 루소는 초기 자연 상태에는 갈등이나 사유 재산이 없었을 것이라고 반박했다. 특히 홉스가 자연 상태의 인간은 선악 개념이 없어 악하며 미덕을 모른다고 주장한 것을 비판하며, 오히려 자연 상태에서는 "타락하지 않은 도덕"이 우세하다고 보았다.
루소에게 가상의 "자연 상태"는 규범적 지침이었다. 이 상태에서 인간은 "서로에 대한 도덕적 관계나 명확한 의무가 없었"고, 접촉이 드물어 개인 간 차이는 중요하지 않았으며, 고독하게 살았기에 질투나 불신, 재산이나 갈등도 없었다. 루소에 따르면, 자연 상태의 인간은 다른 동물처럼 자기 보존 본능인 자기애(amour de soi)와 동족에 대한 공감 능력인 연민(pitié)을 가지며, 이는 이성이나 사회성보다 앞선다. 반면,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상대적 지위에만 관심을 두는 자기애(amour-propre), 즉 허영심은 도덕적으로 타락한 상태에서 나타난다.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달리 자연적 본능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선택을 통해 자신의 본성을 바꿀 수 있는 자유의지와, 스스로를 개선할 수 있는 완전성(perfectability)이라는 독특한 능력을 지닌다. 이 능력 덕분에 인류는 역사적으로 진화할 수 있었지만, 그 진화가 반드시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은 아니었다.
루소는 인간 발달 단계 중 "야만인"의 단계가 최적이라고 보았다. 이는 미개한 동물의 상태와 퇴폐적인 문명 사회의 양극단 사이에 위치하며, 인간이 자연의 제약에서 벗어나 서로 의존하기 시작했지만 아직 불평등이 심화되지 않은 상태이다. 루소는 "인간은 원시 상태에서, 자연이 짐승의 어리석음과 문명화된 인간의 치명적인 계몽으로부터 동등한 거리에 두었을 때, 그 무엇보다 온화하다."[20]고 말했다. 이 때문에 루소가 고귀한 야만인 개념을 창시했다는 오해가 생기기도 했으나, 아서 러브조이 등은 이를 루소 사상에 대한 잘못된 해석이라고 지적했다.[21]

루소에 따르면, 인간이 함께 살기 시작하고 유목 생활에서 정착 생활로 옮겨가면서 사유 재산이 발명되었다. 자연 상태의 평등은 사라지고 불평등이 생겨났는데, 이는 자연스러운 결과가 아니라 인간 선택의 산물이었다. 농업, 야금술, 사유 재산, 노동 분업 등은 사람들 간의 의존성을 높이고 경제적 불평등과 갈등을 심화시켰다. 인구 압력으로 더욱 밀집해 살게 되면서 사람들은 심리적으로도 변화하여, 타인의 시선으로 자신을 평가하고 타인의 인정을 자존감의 필수 요소로 여기게 되었다.[23] 즉, 허영심(자기애)이 만연하게 된 것이다. 루소는 "야만인은 자신의 내면에 살지만, 사교적인 인간은 항상 자신의 외부에 있기 때문에 오직 다른 사람들의 의견 속에서만 살 수 있다"고 지적하며, 이것이 인류를 타락시켜 "순수함과 행복에 치명적인 결합을 만들어냈다"고 보았다. 이러한 불평등 심화 과정에서 부유한 자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영속시키기 위해 정치 체제를 만들었다고 분석했다.
문명을 주제로 한 루소의 주요 저술로는 『학문예술론』(Discours sur les sciences et les arts), 『언어기원론』(Essai sur l'origine des langues), 『인간불평등기원론』(Discours sur l'inégalité parmi les hommes) 등이 있다. 그는 이 저작들에서 일관되게 사치, 학문, 예술 등 문명의 발달이 오히려 인간의 악덕과 타락을 가져왔다고 주장했다.[227] 그는 인간이 혼자서 자급자족할 때는 자유롭고 건강하며 행복했지만, 타인의 도움이 필요해지고 사유 재산이 생기면서 평등이 사라지고 노동이 필요해졌으며, 결국 노예 상태와 비참함이 만연하게 되었다고 보았다.[229]
1755년 리스본 대지진 이후 볼테르가 재난을 빌미로 교회를 비판하고 이성적 사회 개혁을 주장했을 때, 루소는 이를 강하게 비판했다. 루소는 자연재해의 피해가 커지는 것은 사람들이 밀집해 사는 도시와 같은 문명적 요인 때문이며, 자연 상태였다면 피해가 훨씬 적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자연의 질서 속에서 인간의 불행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으며, 이를 통해 오히려 위안을 얻을 수 있다고 보았다.[230][231]
이러한 문명 비판적 관점에서 루소는 교육론인 『에밀』(Emile)에서 "자연의 최초 충동은 언제나 옳다"는 전제 아래, 아동의 자발성을 존중하고 사회의 악영향으로부터 보호하는 자연주의 교육을 강조했다. 그는 초기 교육의 목표가 "덕과 진리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악덕으로부터, 정신을 오류로부터 보호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232]
3. 4. 종교 개혁
폴 존슨 (작가)은 루소를 칼뱅주의자로 평가하기도 했으나,[263] 루소 자신은 종교 개혁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다. 그는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분리된 프로테스탄트의 성경 중심 해석이 특정 교회의 교리로 조직화될 수 없다고 보았으며, 고정된 교리 자체를 부정하는 경향을 보였다. 루소는 성경이 각 개인의 해석에 열려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자연 종교를 옹호했다.[264]젊은 시절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했던 루소는 이후 고향 제네바의 칼뱅주의로 돌아왔고, 남은 생애 동안 기본적인 종교 철학의 틀과 함께 장 칼뱅을 현대적 입법가로서 평가하는 입장을 유지했다.[37] 많은 계몽주의 철학자들이 불가지론적 태도를 보인 것과 달리, 루소는 종교의 필요성을 분명히 인정했다. 그러나 그의 종교관은 기존 가톨릭 및 칼뱅주의 교리와 충돌하는 지점이 많았다.
루소의 저서 ''에밀''에서 나타난 강력한 종교적 관용 주장은 당시 이단으로 여겨지던 무관심주의를 옹호하는 것으로 해석되어, 칼뱅주의 도시 제네바와 가톨릭 중심지 파리 양측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그는 성경 자체는 높이 평가했지만, 당대의 제도화된 기독교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다.[38] 또한 ''사회계약론''에서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좋은 시민이 되기 어렵다는 주장을 펼쳤는데, 이 역시 제네바에서 비난받는 원인이 되었다. 더불어 칼뱅주의의 핵심 교리 중 하나인 원죄 사상을 부정하며, "보몽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인간의 마음에는 원래부터 타락한 성향이 없다"고 명시적으로 밝혔다.[39]
18세기 자연신론자들이 신을 우주를 설계한 비인격적인 존재로 보는 경향이 있었던 반면, 루소의 자연신론은 감정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독특한 특징을 지녔다. 그는 신이 자연 창조물 속에 선한 모습으로 존재하며, 사회의 부정적인 영향과는 분리되어 있다고 보았다. 자연의 아름다움에서 영적인 가치를 발견한 그의 관점은 19세기 낭만주의 운동에서 나타난 자연과 종교에 대한 태도를 예견하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일부 역사가들(윌리엄 에버델, 그레이엄 개러드, 대린 맥마흔 등)은 이러한 측면 때문에 루소를 반계몽 운동의 흐름 속에 위치시키기도 한다.[40][41]
루소는 자신의 자연신론이 무신론 철학자들의 주장보다 더 심한 비난을 받는 것에 불만을 표하기도 했다. 그는 "파리 대주교 드 보몽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 자신의 종교관을 변호하며, 종교 문제에 대한 자유로운 토론이 신앙을 강요하는 것보다 본질적으로 더 종교적인 행위라고 주장했다.[42]
4. 저서
wikitext
연도 | 원제 | 한국어 번역 제목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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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2 | {{lang|fr|Projet concernant de nouveaux signes pour la musique|} | } || 음악을 위한 새로운 기호 제안 ||